'코로나19'를 피해서 제주에 왔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제주는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태풍 10호 '하이선'이 훑고 간 곳곳마다 어수선하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흔적으로 남겼다.
여행객이 끊겨서 생계가 막막한 제주도민의 시름과, 태풍으로 농사에 피해를 본 농민들의 한숨을 짐작해 본다.
태풍이 뿌린 쓰레기야 치우면 되겠지만, '코로나19'로 인한 한숨은 무엇으로 씻을 지...
무거운 발걸음은 심난스럽기만 하다.
이번 2주간의 제주 여행은
많은 여행자들이 주목하는 유명한 관광지 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제주스러운 곳을 찾아 보려고 한다.
오늘 온 곳은 제주시 애월읍 구엄.중엄.신엄 지역으로 일명 엄쟁이 마을이란 곳이다.
첫 목적지는 구엄 돌염전이다.
구엄리에서 시작해 고내리 까지 ‘엄장해안길’이라는 ‘해안누리길’이 조성돼 있다.
구엄리 포구를 지나 만나는 구엄리 돌염전은 넓게 드러누운 현무암 위에서 소금을 생산하던 곳이다.
'소금빌레'라고도 일컬어지는 구엄리 돌염전은 구엄리 주민들이 소금을 생산하던 천연 암반지대였다.
빌레란 제주어로 '너럭바위'를 뜻하니, 소금빌레란 소금밭, 즉 돌염전이란 뜻을 담고있다.
조선 명종 14년인 1559년 강려 목사가 부임하면서 구엄리 주민들에게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바위 위에 찰흙으로 둑을 쌓고 그 곳에 고인 바닷물이 햇볕에 마르면서 생기는 소금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소금밭은 390여 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생업의 터전이자 삶의 근간이 돼 왔다.
품질이 뛰어난 천일염이 생산되다가 해방 이후 폐기돼 지금은 소금 생산을 하지 않고 있지만 지난 2009년 제주시가 돌염전을 일부 복원하고 관광 안내센터와 주차장 등을 설치했다.
돌염전의 유래, 소금의 생산방법 등 다양한 정보가 있는 안내판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애월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여행자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이미 애월 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코발트빛 바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당연한 여행의 설레임과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주는 환상적인 매력에 빠져든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발 아래로 둔다면 당장에 신기한 소금빌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름도 예쁜 소금빌레는 돌염전,즉 너럭바위라는 제주방언 빌레라는 말을 알게되면 이 지역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소금빌레라는 말 자체가 독특한 제주말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현재 신엄.중엄.구엄리의 옛이름은 엄쟁이라 하는데, 민간에서는 그 의미를 엉장(낭떨어지)였다는 데서 엉장이 엄쟁이가 되었다는 설과, 소금밭과 소금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염장이가 엄쟁이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구엄리는 삼별초 입도시 세워진 마을로 추정되며, 중엄리는 약 420여전 전에 고씨와 양씨가 대섶동산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신엄리는 5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청되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한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신엄리에서 분리된 용흥리에서는 1960년대 일본에서 들여 온 감귤 묘목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한라산 북쪽 지역에서 처음으로 감귤을 재배한 마을로 일컬어지는 이곳은 연간 3천톤 이상의 감귤이 생산 된다고 한다.
일찍이 감귤 농사로 부를 이룬 이 마을은 비교적 제주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서귀포의 대대적인 개발과 동쪽 함덕리쪽의 상업화로 인해 잃어버린 제주의 멋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간직돼 있는 몇 안되는 제주스러운 마을이다.
마을 곳곳에 올레길이 남아 있으며 농경지 밭경계가 돌담으로 유지되고 있다.
수백년의 풍파 속에서도 고유의 모습을 간직한 채 묵묵히 역사를 이어오는 오래된 마을.
그 마을의 풍습과 자연을 탐구하는 이번 여행은 제주도 여행이라기 보다는 엄쟁이 마을 여행이라 하는게 걸맞겠다.
이름난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보다 마을 여행자로서 뚜벅뚜벅 역사 공부하듯 걷는 맛에 흠뻑 빠져 본 엄쟁이 마을 여행이었다.